아이디
비밀번호

   
Untitled Document
템플스테이
선무도 수련회 신청
선무도화랑사관학교
템플스테이
 
 
 
 
The Scent of moving Zen '움직이는 선의 향기' (Temple life)

템플라이프란 숙박을 하지 않고 오전이나 오후에 약 2~3시간동안 사찰참배, 선무도 강의와 시연, 선무도 체험, 공양(사찰음식)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경주에는 연간 수많은 관광객이 개인 및 단체로 다녀갑니다. 요즘은 체험관광에 대한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외국인들 및 국내 단체 관광객들이 선무도 수행체험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관심인 웰빙 추세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초, 중,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단들이 화랑의 정신이 깃든 선무도 시연 관람 및 체험을 무척 좋아하고 있으며 많은 학교에서 템플라이프를 신청하고 있습니다. 수학여행단인 경우 400명이 동시 참여가 가능하며 1시간이 소요됩니다.


<템플라이프 일정 및 비용>

A) 사찰참배 및 관람 = 사찰 측에서 주지스님을 비롯한 전담 가이드가 안내함
*선무도 강의와 시연 = 주지스님 또는 법사님의 강의와 사범들의 선무도 시연
*선무도 체험 = 건강과 수행에 관련된 선요가와 명상, 기공, 선무도 수련
*공양 = 사찰음식으로 뷔페식 또는 발우공양 (승가 전통 공양의식으로 교육적인 효과가 있음)
식사를 뷔페식으로 할 경우 2만5천원
발우공양은 3만원(최소 10명이상 가능)

B) 사찰참배 및 관람, 선무도 강의 및 시연, 선무도 체험 참가비 = 2만원 (최소 10명 이상 가능)

C) 수학 여행단
공양(식사)을 하지 않고 사찰참배와 선무도 시연관람 및 체험만 할 경우(1시간) 참가비 1인당 5천원(100명 미만), 1인당 3천원(100명 이상)
공양을 할 경우 = 발우공양 1만원, 뷔페식 7천원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 광유(光有)성인일행이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원효(元曉)스님께서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었으나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입니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건립한 것 같다고 합니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고,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습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습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습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고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입니다.
일연(一然)대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
를 중창(重)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합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석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고,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견대란 명칭은 《주역(周易)》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千利見大人)?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부왕인 문무왕의 해중능묘(海中陵墓)를 망배(望拜)하기 위해 지었다는 곳으로, 1970년 그 건물터를 발견하여 새로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이곳은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죽은 문무왕의 화신(化身)이라는 용을 보았다고 전하는 곳으로,《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와도 유관한 유서 깊은 유적입니다.